메디아

<공연과 이론> 제 5호 2001년 여름호

죽음과 피의 역사

- 극단 그림연극의 <메디아>

 

정민영

기호와 상징,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이용한 상상력의 확대 - 이는 잘 짜여진 플롯과 줄거리에 의존하는 기존의 보편적인 사실주의 연극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표현 양식을 추구하는 현대 연극이 지향하는 작업방식이다. 이러한 연극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관객의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관객을 예술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예술의 공동 생산자로 끌어올린다. 극단 그림연극의 <메디아>(이현찬 작,연출)는 이같은 시도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이다.
<메디아>-는 조국과 가족까지, 모든 것울 버리고 선택한 남편 이아손의 배반에 두 아들을 죽여 복수하는 메디아의 비극적 이야기를 권력과 욕망의 폭력으로 순환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풀어낸다. 무대는 죽음과 피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확대된 해골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손과 기형적 얼굴이 무대의 좌우에 배치된 가운데 무엇인가 흰 천에 덮여서 서있다. 여기에 알 수 없는 신호음, 그리고 천둥과 함께 점차 증폭하는 폭우 소리가 극장을 뒤덮는다. 흰 천으로 덮여있던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들은 골 얼굴없는 흰 가면에 방독면을 쓴 인물로 나타난다, 흰색과 검은 색의 대비 속에서 생명이 사라진 세계, 암울한 미래가 보인다.

이 같은 죽음의 배경 앞에새 그들이 춤을 이용한 몸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은 권력과 성(性)을 포함한, 인간의 무분별한 욕구로 가득 차 있는 혼돈의 현재이다. 얼굴이 없던 그들이 스스로 눈과 입을 그린다. 잘못 흘러가고 았는 현재의 역사를 보고 발할 눈과 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러한 눈과 입이 있는가? 이 무대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다.

여기에 스피커에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하이너 뮐러의 텍스트가 울려나온다. 압축된 인어와 3개의 독립된 징면으로 구성된 뮐러의 「황폐한 물가 메데아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중 첫 번째 장면,「황폐한 물가」의 텍스트 일부가 이용된 것이다. 죽은 나뭇가지가 널려 있고 물고기 시체들과 똥덩어리, 콘돔갑이 떠다니는 황폐한 호숫가를 배경으로 찢짓어진 월경대에서 억압당한 콜키스여인들의 피를 보고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더럽혀진현해의 역사를 옹시하며 신화 속에 내재하는 폭력구조와 현재의 역사를 연결하고 있는 뮐러의 이 텍스트는 이 무대가 그려내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암울한 역사구조를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상승시킨다. 이 같은억압과 폭력의 역사구조 속에서 한 여성이 무대의 중앙 계단에 잉태했던 것을 낳아 놓는다. 붉은 천으로 싱징화된 이것은 혼돈의 현재에서 새롭게 태어난 생명(역사)일 수도 있으며 억압당한 자들의 흔적(피)일수도 있다. <메디아>의 1부, 프롤로그는 이처럼 철저하게 폭력과 혼돈으로. 기형화한 현재와 그로 인해 죽음의 흔적만 발견하게 될 미래의 어두운 모습을 그려낸다. 이 죽음과 피의 이미지는 마지막 3부, 에필로그에서 무대 좌우에 배경처럼 걸려있던 거대한 손과 얼굴이 빗소리와 함께 죽음의 사신처럼 관객을 향해 덮쳐 오고, 무대 앞에서는 8개의 흰 가면이 생각에 잠긴 채 피를 쏟아내는 것으로 연결되어 극 구조 상 하나의 틀을 형성한다. 현재와 미래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와 피로 드러난다. 결국 죽음과 피의 혼적으로 얼룩져 있는 어두운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이 잘못된 역사의 순환을 인식하고 이에 저항할 힘은 어디에 있는가? 신화 속의 인물 메디아가 그 힘을 보여 준다.

<메디아>의 2부는 남편 이아손의 배반에 두 아들을 죽여 복수하는 메디아의 이야기이다. 크레온왕의 추방 명령.권력을 얻기 위해 크레온의 딸 크레우사와 결혼하는 이아손, 독이 묻은 신부복을 보내 크레우사를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이는 메디아의 이야기가 1부와 3부의 강렬한 시각적, 청각적 상징으로 가득 찬 무대 사이에 하나의 줄거리를 가지고 삽입되어 있다.

2부가 갖는 가장 큰 상징성은 메디아의 복수에 있다. 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야만적인 국가 콜키스 출신의 메디아와 문명국가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야만과 문명의 대립,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권력을 얻으려는 이아손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의 권력구조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전통에서 드러나는 억압구조이며, 이를 인식한 메디아의 복수 행위는이와 갈은 잘못된 역사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읽혀진다. 메디아가 모든 복수를 마친 후 자신 앞에 서 있는 이아손을 보며 유모에게 묻는 말, "유모, 이 남자를 아세요?"라는 질문은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인식하고 역사의 잘못된 흐름을 바꾸려는 주체의 존재 표현이다. 연출자 이현찬은 이 이야기를 앞서 언급한 하이너 뮐러의 작품 중?두 번째 텍스트「메데아자료」를 통해 들려준다·. 뮐러의 이 텍스트는 처음의 메디아와 유모의 대사, 그리고 마지막 이아손과 메디아의 짧은 대사를 제외하면 폭력의 역사에 대한 주체석 인식과 적극적 저항이 철저하게 시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메디아의 독백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를 이용하면서 메디아의 복수 과정을 그리그 있는 2부는 이 공연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공연의 취약점은 2부에 드러나 있다. 어차피 메디아와 관련된 신화의 내용을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로 그 내용을 폭력과 억압의 순환이라는 역사 구조에 비유하여 상징화하고 있는 이 공연은 메디아의 복수 과정 자체보다는 메디아의 복수가 갖는 의미, 그리고 그 의미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메디아의 복수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다보니 뮐러의 압축된, 텍스트에 줄거리 전개를 위한 연출의진부한 텍스트가 삽입되었고 이것이 상징의 강한 힘을 앗아가는 역효과를 낳았다.

관객에게는 하나의 볼거리로 보일 수도 있었겠으나 그림자 극으로 처리한 이아손과 크레우사의 첫날 밤 장면은 작품 전체가지니고 있는 상징성 관계에서 불일요한 장면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메디아가 보낸 신부복을 입고 크레우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단순한 내용 이외에 아무 것도 보여주지못했다. 또 한 가지 2부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2부의 시작에 인형으로 처리한 두 아들이 등장한 장면이다.

두 아들을 인형으로 처리한 시도 자체는 관객들로 하여금 또 다른 상징 매체를 통한 상상력 확장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막간극으로서, 죽음의 현재와 미래라는 결론을 내고 있는 이 공연의 3부를 뒷받침 해 줄 수 있있던 이 장면은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해 주지 못한 채 불분명한 인형의 움직임으로 남고 말았다. 1부와 3부와는 대조적으로 밝은 리듬의 음악과 함께 등장한 두 인형,?즉 두 아들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밝은 배경음악이 알려주듯 두 아들은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들로서 미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점에 주목해야 한다. 메디아는 이 아들을 죽임으로써 남성 중심의 역사, 그 역사가 끊임없이 만들어낼 폭력의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명확하지 않은, 무엇인가 어떤 놀이를 하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 버렸는데 그 놀이 속에 폭력과 억압의 이미지가 상징을 담음으로써?또다시 암울한 미래의 역사가 계속될 것이라는 강력한 전달력이 표출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상징성이 분명히 드러났더라면 이 장면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압측해 전달해줄 수 오는 코드로서 효과적인 막간극이 되었을 것이다.

1부와 3부에서 보여준 다양한 상징과 기호의 시도, 그리고 풍부한 볼거리로 의욕에 넘친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메디아>는 메시지 건달을 위한 코드의 부재, 안무의 평이함에서 오는 지루한 움직임. 그리고 2부의 늘어진 줄거리 전개 등으로 인해 강한인상을 주지 못했다. 텍스트 사용에서 보듯이 전체적으로 철저히 하이너 뮐러의 시각에 따른 공연이었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과감한 움직임과 연출의 독자적인 해석이 아쉬운 공연이었다. 이 실망은 전적으로 이 작품이 "이현찬 작"으로 발표된다는 사실에 가졌던 기대에서 기인한다. 연출은 하이너 뮐리의 텍스트를 "인용"한다고 했다. 인용은 단순히 가져다 쓰는 것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인용을 자신의 극작법중 한 가지로 효과적으로 이용한 뮐러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인용은 의미의 확장과 새로운 해석의 결과로 나타날 때 진정 예술가 고유의 표현방법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