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한국연극 2001년 7월호

그림연극의 장점을 살린 연극

극단 그림연극 <메디아>

 

글 김만수 <연극평론가>, 인하대 교수>

극단 그림연극의 <메디아>공연(이현찬 작·연출)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하이너 뮐러의 <메디아 마테리알>을 원전으로 한 이번 공연에서, 연출자는 이 텍스트에 그림-연극(Bildtheater), 춤-연극(Tanztheater)의 개념을 결합시키고 있다. 문학적 연극에서 벗어나 시각적인 연극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이번 연극에서 연출자는 다양한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대극장 무대를 단번에 채워낸 거대한 인형 조각, 야손의 침실 장면을 비춰내기 위한 그림자막, 두 아들을 극소화한 이미지로 표현한 작은 줄인형 등이 그것이다. 특히 극의 결말 부분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모습을 여덟 개의 인형으로 꾸며낸 부분은 그림 연극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장면 중의 하나로 보였다. 또한 흑백의 의상과 가면이 주는 강렬한 대비감, 코러스의 입체적인 활용, 배우들의 마임과 인형들의 움직임은 관객의 상상 작용을 촉매하는 꼴라쥬 효과를 보여주었다.그러나 1시간 20분의 짧은 상연 시간내에서 춤과 그림이 부각되다보니, 이 극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인물 메디아에 대한 연극적 집중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두 자식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한 여성의 모습은 고대 희랍전설 내에서도 매우 충격적인 장면인데, 이러한 메디아 성격의 그로테스크함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이 작품은 정공법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유리피데스의 <메디아>라는 작품을 처음 접한 이후, 이 작품이 다분히 남성주의적인 시각에 갇혀 있으며, 넓혀보면, 그리스 연극 전체가 이러한 남성 우위, 여성 비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필자는 이번 연극에서 이러한 경향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기대했다. 연출가도 공연 프로그램 등을 통해 "남자와 동등하지

않았던 여자를 주제로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비판의식을 내세우고 있는데, 실상 공연에서는 이러한 비판의식이 그저 춤에 묻혀버린 인상을 주었다. 또 연출가는 1막에 "현대의 문제점인 마약, 동성애, 살인"을 춤으로 표현하겠다는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들의 어떤 부분은 마약, 동성애, 살인 등을 전혀 연상시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1막과 3막의 춤과 그림 위주의 장면들이 2막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와 어울리지 못한 채 겉돌고, 상대적으로 2막은 빈약해졌다. 우리가 춤-연극, 그림-연극에서 기대하는 것은 언어적 형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춤과 그림은 언어적 요소를 최소화 하면서 그 여백의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일 터인데,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런 형식의 연극 밑바탕에는 미니멀리즘이 깔려 있다. 작품의 구성요소를 최소화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직관에 이르게 하는 미니멀리즘은 "최소의 핵심"을 그려낼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번 공연의 핵심 주제는 피눈물을 흘리는 가면의 이미지를 통해 잘 표현되고 있다. 일부러 커튼콜이라는 무대 관습을 배제한 이번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왜 인간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말없는 가면의 제시만으로 이러한 주제를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림연극의 장점일 것이다. 그러나 몇 부분에서는 제대로 된 그림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예컨대 석필로 얼굴을 그리는 장면, 비누방울을 부는 아이의 모습은 재현적인 장면으로 보기에는 너무 미미하고 보잘것없어, 대극장이라는 무대내에서의 연극적 표현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그림-연극은 인간과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특유의 과장과 절제를 통해 사실적인 현상 이면에 감추어진 삶의 이면을 그려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번 공연에서 성공한 부분은 그림연극의 장점을 잘 이용한 부분이고, 실패한 부분은 그림연극을 잘 활용하지 못한 부분에 있었다.왜, 그림-연극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랫 동안 더 고민해 볼 문제이다.